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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침해예방자료: 권리란 먹고 싸고 아픈 존재를 위한 것 -제25조-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09-13 16:48:37 조회수 101

 

권리란 먹고 싸고 아픈 존재를 위한 것

 

아픔갑자기 크론병이라는 질병을 진단받은 건 스무 살 때였다. 한 순간인 것처럼 보이는 진단은 사실 꽤 당혹스러운 나날들의 연장선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시작은 첫 대학 면접 날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채 나는 극심한 복통으로 면접 당일 새벽에 응급실을 갔고, 면접은 끔찍했다. 재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항문 근처에 커다란 염증이 생겼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농양 제거 수술을 받고 몇 주 뒤, 재수술을 권하는 의사를 믿지 못해 옮긴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이 크론병이었다. 응급실에 간 날부터 진단까지는 반년이 넘게 걸렸다.

 

재수학원 담임선생님은 내게 사범대 진학을 권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크론병이 있으면 오랫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발견도, 진단도 꽤 빠른 편이었던 나는 관해기(증상이 완화되어 일상 영위에 큰 문제가 없는 기간)도 빨리 왔다. 진단 후 몇 달 만에 만성적인 두통, 관절통, 복통과 같은 주요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는 의미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좀 더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아니, 그때만 해도 관해기에 돌입한 나는 내 몸으로 꽤 많은 걸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전히 남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는 없었다. 수험생활 중과 마찬가지로 나는 친구들과 따로 밥을 먹고, 술 대신 물을 마셨다. 남들은 걸핏하면 밤을 새며 조모임을 했지만, 나는 밤늦게까지 조모임을 한 다음 날에 수업 도중 나와서 약을 먹고 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갑자기 수술을 한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지만, 만성질환이 괜히 ‘만성’질환일까. 질병으로 인한 아픔은 그 자체로 만성적인 것이었다.

 

 

노동그러나 증상이 줄어든다고 ‘멀쩡’해지는 건 아니었다. 일식당에서 주문을 받고, 요리를 하고, 서빙을 하다가 머리가 ‘핑’ 하니 어지러워지는 순간이 점점 자주 찾아왔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묶어서 버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팔 힘줄 안쪽의 희한한 위치에 염증이 생겼고, 심지어 가장 편한 종류의 일 중 하나인 과외를 하다가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점점 잦아졌다. 급성기의 증상들은 몸에 만성적인 피로와 체력 저하를 가져왔고, 이제는 내 몸에 생기는 문제가 질병 때문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다. 크론병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을 겪는 이들에게는 생각보다 흔한 감각이다. 아파서 힘든 건지, 지쳐서 힘든 건지, 게으른 건지 나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대학원에 진학한 데에는 학업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기업들에 낸 입사지원서가 모두 서류전형에서 탈락했기 때문도 있었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입사지원서에는 하나같이 군 복무에 대한 항목이 있었다. 크론병은 신체검사 5급에 해당하는 사유로, 나는 현역 복무와 예비군을 건너뛰고 바로 민방위에 투입되었다. 소위 군 면제다. ‘신의 아들’은 고작 입사지원서 앞에서 작아졌다. 군 면제 사유를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탈락을 예감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재수학원 담임선생님이 사범대를 권한 게 단지 일정한 생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취업 대신 대학원을 선택할 때는 숫자와 그래프에 담기지 않는 아픔과 마음을 담고 싶어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질병은 ‘먹고 살기’, ‘더 나은 삶’이라는 목표를 향한 선택지들을 조금씩 굴절시켰다. 아픈 와중에도 대학 입학까지는 나름 순조로웠던 내 진로가 어딘지 모르게 구불구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글과 말로 간신히 1인분 정도의 몫을 해내고 있는 일상도 그러한 굴절들의 결과물이다.

 

 

생활그럼에도 생활이 어떻게든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산정특례제도의 영향이 컸다. 나는 희귀질환 산정특례 제도로 의료비의 90%를 국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그런데 크론병 환자가 계속 많아져서 크론병이 산정특례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다른 환우들의 염려를 접했다. 혹자는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의료비에서 본인부담금을 줄여주는 ‘본인부담상한제’가 산정특례제도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산정특례제도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인부담상한제는 경제적 수준을 기준으로 하고, 산정특례는 소수의 희귀질환, 즉 ‘특정 질병’을 기준으로 한다. 둘 다 의료비를 보전해준다는 점에서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둘은 기준이 다르기에 효과도 다르다. 본인부담상한제는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의료적 이유로 더 어려워지지 않도록 하는 구조이고, 산정특례는 현재 아픈 사람이 의료적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는 구조다.

 

 

제25조

1. 모든 사람은 의식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 사망, 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의 경우에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권리란 먹고 싸고 아픈 존재를 위한 것

 

내가 산정특례 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여건이 아니라 몸의 상태 자체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세계인권선언 제25조는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질병, 장애, …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의 경우에 보장을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나는 이 조항이 다름 아닌 몸의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여기서 건강은 생활수준의 기준이고, 질병과 장애는 생계 결핍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질병과 장애는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 아픈 사람에게 적대적인 노동조건, 지속적인 의료비 지출 등으로 아픈 사람의 경제적 조건을 악화시킨다. 내가 겪는 크론병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의 경우 하나의 질병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자가면역질환이나 합병증으로 이어지곤 하며, 아픈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사회의 불화 안에서 우울이나 불안 등으로 정신과를 찾기도 한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은 질병에 대한 지원이 없는 사회에서 소위 ‘1인분의 몫’을 하기 어렵다. 아직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할지라도, 현 상태의 지속 가능성을 누구도 담보해줄 수 없게 하는 것이 질병과 장애다. 따라서 질병과 장애와 같은 몸의 상태가 경제적 여건에 포함되는 변수가 아니라, 그것과 동등한 수준에서 섬세히 고려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변수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존엄무엇보다도, 몸을 기준으로 삼아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은 몸이 참으로 불안정하며 지저분하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장애를 겪는 친구들과 만날 때면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특히 염증이나 욕창과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다. 염증과 욕창은 아픈 것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도 종기가 쉼 없이 생기거나 화장실에서 피를 보는 일은 여전히 수치스럽다. 아무리 나의 질병을 수용하려고 해도, 약을 먹는 나는 수용할 수 있지만 종기가 생기고 피를 흘리는 나는 여전히 수용하기가 어렵다. 질병을 수용하는 것과 아픔에 체념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그렇게나 희미한 이유에는 바로 이런 몸의 증상들이 있다. 다른 조건들과 동등하게 몸을 고려한다는 것, 혹은 몸을 기준으로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바로 그러한 몸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일 테다.

 

우리에게 존엄이라는 개념, 인권이라는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프고, 더럽고, 때로는 수치스럽고, 나에게서까지 나를 감추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몸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안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지저분한 것을 권리의 근거로 삼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권리를 몸을 기준으로 부여하는 세계인권선언 제25조 1항은 인간의 상에 대한 전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처럼 만들어진 지 수십 년이 된 세계인권선언은 여전히 꽤 급진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그 주장이 효과를 지니려면, 우리는 지극히 구체적이고 지저분한 몸의 실재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 몸을 둘러싼 보편과 특수 사이의 끝나지 않는 진동을 계속 붙드는 것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살아있게 하는 실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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